세계 정부로 부터 약탈 행위를 허가

칠무해 .

‘위대한 항로’ 3세력중 하나…….

왕의부하…………..

세계 정부로 부터 약탈 행위를 허가 받은자들………..

수확물 중 얼마는 정부에 낼 의무가 있다……………

아직 이름거론된사람은 5명………………………..

크로커다일 , 도플라밍고 , 쿠마 , 미호크 , 징베

만화책이나 애니에 나온사람은

크로커다일 도플라밍고 쿠마 미호크.

이름이 거론 안된 사람 2명

사망????(확실치않음.)한사람 1명…………………………(크로커다일)

미호크는 세계 최고 검객 (흑도사용.)……………

크로커다일은 바로크 워스크 (범죄집단)Mr.0이라고 불림………….

도플라밍고는 대형 신인 ‘베라미’를 부하로 둠..하지만 죽임……….

도플라밍고는 사람을 조정하는 기술을 가지고있음 (정확히는 밝혀지지않음)

도플라밍고는 원피스 지금까지 나온 현상금 중 가장 높은 현상금 (3억4천만-정확?)

쿠마는 2번쨰로 높은 현상금 (2억9천만???-정확하지않음)(곰처럼생김!)

크로커다일은 8천 1백만 베리………………………..

ㅡㅡㅡㅡㅡㅡ이정도로 칠무해 파헤치기 끝~~~~ㅡㅡㅡㅡㅡㅡㅡㅡㅡ

————저의생각&의견—————————————–

일단 원피스 책다읽어보신분이라면 다 아는데 이런글 써서 ㅈㅅ합니다~….!

칠무해는 위다한 항로 3대세력중하나 해적의 무덤이라는 그런곳에서

3대세력에 속한다는것은 무시못할 힘을 가지고 있다………………….

물론 나온사람중에 크로커다일(루피한테졋긴하지만),미호크,도플라밍고는

정말 상상을 초월로 쌔다………………………………………

도플라밍고가 해군들보러’바다의쓰레기?'(정확하지않음)라고 한듯보면

해군을 깔보고?있다…………………………………………….

7명을 모으려는 성질이있다?(크로커가 죽자??<~(정확하지않음) 회의를 열어 후계자 결정) 제의견은 쿠마는 곰처럼생겼으니 곰곰열매????????????????????? 도플라밍고는 사람조정하니 꼭두각시나 실실.............. 거미거미 열매는 동물계쪽이라 자기가 거미로 변해야 쓸수있을껏 같아 제외. 나머지 2명도 '이름'이 '동물'과 관련이있을수 있다.. 징베-고래? ,도플라밍고 - 홍학 , 홍학목도리?를하고뎅김. 크로커다일 - 악어 , 바나나악어...등등... 쿠마- 곰 , 곰처럼생김. 미호크 - 매 (호크는 '매'란뜻..) , 매의눈 사나이 ....등.......... 아마도 그래서 나머지 2명도 동물과 관련이 있을뜻............. 제의견 여기서 마치고 밑에 토론 의견달아주세요^^ ㅡㅡㅡㅡㅡㅡㅡ의문점????????????????ㅡㅡㅡ토론?ㅡㅡㅡㅡㅡㅡㅡㅡㅡ ㅡㅡㅡㅡㅡ알수없는 문제들.....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왕의부하 칠무해 그렇다면 '왕'은 누구일까?.................... 제의견: '왕'이 누군지는 알수없고 ㅡㅡ.;;;;;;;;;;;;;;;;;;;; 성지 마리오?인가.....어쨋든 거기서 크로커다일 후계자를 정할떄 해군과 칠무해가 모인것을 보면........ 해군,칠무해를 부하로 두고있다는점.......................... 그리고 위에 써논대로 '세계 정부로 부터 약탈 행위를 허가 받은자들 수확물 중 얼 마 는정부에 낼 의무가 있다.' 그렇다면 정부에게 돈을 받치는 건데....... 그렇다면 세계정부? 중 가장높은사람이 '왕'이 아닐찌.........?........ 2.미호크는 악마의 열매를 먹었을까? 제의견 : 안먹었을뜻 싶습니다.. 조로 같은경우도 강철도 베어 버리는데.... 세계최고 검객이 배하나쯤 못부실지................................ 3.칠무해 후계자는 누가 될까?............. 제의견 : 감이 안잡히지만 그떄 '라피트'가 온걸로 봐서...... 그 경호망을 뚫고 거기까지 같다면 검은수염도 상당한 실력자 ? 라는걸 알수있다?.......어쨋든................................................. 4.세계정부는 왜 칠무해를 뒀을까? 성지 마리오?....<~(정확치않음) 에서 모일때도 2명은 나오지 않았다..... 따라서 부하라고하지만 시키는대로 말은 듣지 않는것을 알수있다....... 부하도 아니고 그냥 돈 받치니까 해적행위를 허락했다면........ 왜 칠무해를 뒀을까?...............해군은 정의 정의 그러면서 결국 칠무해도 해적인데 해적이 돈받친다고............. 같이 모여서 크로커다일 후계자 정하고................ 강한해적은 돈 받치면 칠무해 될수있단 말인가 ㅡㅡ?.............;; 어쨋든 왜 뒀을까???????????? 5.크로커 다일은 피를 안묻혀서 싸우나?............................. 루피도 피를 묻혀서 겨우??이겼다........... 크로커 다일같은경우는 모래 라서 피를묻히면 모래가 진흙?되서졋나?........ 그렇다면 진흙되면 기술은 어떻게 쓰나?........................... 그러면 악마의열매 능력자라 물에 약하기 때문에 그런가?............ 그것은 루피도 마찬가지이다 ........................... 물을 묻혀서 싸우면 이길수도 있을텐데......................... 아니면 피도 낫는데 왜 안발라 싸웠는지....... 몸에아니라도 그 갈고리 에다가 발라서 싸웠으면 이겻는데.... 어쨋든 알수없다 만화라서 그런가 ㅡㅡ?.......... 다산초당은 사적 제 107호로 지정되 있습니다 강진! 햇빛 아래 번쩍이는 원색의 산과 들 구강포의 잔물결도 아름답지만 사람에 마음에 새겨지는 아름다움중 큰 것은 아름다운 사람과 그사람의 아름다운 발자취가 아닐까 합니다 저는 강진땅의 남도다운 아름다움은 다산 정약용 선생님의 자취로 하여 그 빛을 더 한다고 생각 합니다 강진읍에서 남서쪽 구강포 서쪽 모퉁이를 끼고 비스듬히 내려오면 도암면 귤동 마을이 있는데 마을 뒤 만덕산 기슭이 다산 정약용선생의 유배지 이고 다산 학의 산실인 다산초당이 있습니다. 다산은 차나무가 많았던 만덕산의 별명이고 정약용선생의 호 다산은 여기에서 유래됬다고 합니다 정약용 선생은 장장 18년의 귀양살이 가운데 10년을 다산초당에서 지내셨고 언제 끝날지 알수 없는 자신의 생애의 한 겨울속에서 동백꽃처럼 붉게 학문과 사상을 피워 올렸습니다 선생이 사학(邪學)(천주교)에 연루되어 죄인으로 강진에 귀양 오신것은 순조 1년(1801) 11월이였고 그해 봄에 조정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던 신유교옥에 연루되어 간신히 죽음을 면하고 경상도 장기로 유배 되었다가 가을에 황사영 백서사건이 일어나자 다시 서울로 불려가 문호를 받았으나 별다른 혐의가 없으므로 유배지를 이곳 강진으로 옮겨 왔다고 합니다 (황사영은 정약용의 조카사위 였다) 선생이 처음 강진에 도착했을때는 촌사람들이 서울에서 벼슬을 하다가 "대역죄" 를 짓고 귀양온 선비에게 겁을먹고 앞다투어 달아날뿐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았고 강진읍 동문밖에 있던 주막집 노파의 인정으로 겨우 거처할 방 한칸을 마련하여 그 오막살이 주막의 뒷 방에 사의재(四宜齋)라는 당호를 붙히고 만 4년을 지냈다고 합니다 사의재란 생각,용모.언어 동작 의 네가지를 의로써 규제하여 마땅하게 해야할 방 이란 뜻이라고 합니다 누구하나 말걸어주는 사람도 없던 그 시절 선생은 오히려 "나는 기회를 얻었구나" 하시며 스스로 위로 하며 상례(喪禮)를 연구 하며 침식을 잊었다고도 합니다 정약용 선생이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보면그당시의 심정을 이해 할 것 같습니다 "폐족의 자제로서 학문마저 게을리 한다면 장차 무엇이 되겠는가 하시며,과거를 볼 수 없는 처지가 되었지만 이는 참으로 독서할 기회를 얻었구나" 하셨고 너희들이 만일 독서하지 않는다면 내 저서가 쓸데없이 될테고, 내글이 전해지지 못한다면 후세 사람들이 다만 사헌부의 탄핵문과 재판 기록만으로 나를 평가할것이다" 다산 선생은 1805년 겨울 부터는 강진읍 뒤의 보은산에 있는 고성암 보은산방에 머물며 주역을 연구하셨고 그 다음해 겨울 부터는 강진 시절 선생의 애제자가 된 이청(李晴)의 집에서 기거 하셨으며 다시 귀양살이 8년째 되던해 1808년에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기셨다고 합니다 다산 초당은 본래 귤동 마을에 터를 잡고 살던 해남윤씨 집안의 귤림처사 윤단의 산정 이였다고 합니다 정약용 선생이 9살되던해 세상을 떠난 그의 어머니는 조선시대 삼재의 한분으로 손꼽히던 공재 윤두서 선생의 손녀이고 윤두서 선생은 저 유명한 고산 윤선도선생의 증손이며 귤동마을 해남윤씨 들은 다산정약용 선생에게 외가쪽으로 먼 일가 뻘이 되었다고 합니다 귀양살이 여러해가 지나자 삼엄했던 관가의 눈길이 누그러지자 주위에는 자연히 제자들이 모여 들었고 그 가운데 윤단의 아들인 윤문거 세 형제가 있어서 정약용 선생을 다산초당으로 초빙했다고 합니다 다산초당으로 오르는 오솔길 가에 오르면 대나무와 소나무가 빽빽해서 대낮에도 그늘이 짙은걸 알수있습니다 자연을 벗 삼아 소나무 향기를 맡으며 긴 비탈길을 오르면 길가에 무덤이 하나 있는데 그무덤이 윤단의 손자이며 정약용 선생의 제자였던 윤종진 선생의 무덤이라고 합니다 초당으로 올라가는길에는 동그란 눈과 손가락이 앙증스러운 자그마한 동자석은 두 기가 말간 얼굴로 묵묵히 정약용 선생님 처럼 무덤앞을 지키고 잇습니다.어둑어둑한 숲 길 의 맑은공기와 동백나무숲을 감상하며 곧장 올라가다보면 다산초당, 이곳에 전부터 있던 윤단의 초당 좌우에 동암과 서암을 짓고 선생은 주로 동암에 기거하셨으며 천여권의 책을 쌓아놓고 스스로 즐기셨다고 합니다 서암은 주로 윤단의 아들과 손자들로 이루어진 제자들의 거처였고 초당은 교실로 썼다고 합니다 지금 다산초당은 너무 크다 싶은 정면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초당"있고 양옆 기와를 이은 동암과 서암이 자리하고 좀 떨어진 동쪽 산마루에 천일각이 있습니다. 초당 이라더니 어째 번듯한 기와집이 있을까 궁금하시죠? 지금 집들은 폐허가 되었던 옛 터에 다시 크게 복원한 것 입니다 1957년 다산유적보존회가 "초당"을 복원 했고 1974년 동암과 서암이 복원됬고 새로 천일각이 지어 졌다고 합니다 선생은 귀양에 풀려 고향으로 가신후 강진의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초당과 동암 서재의 지붕은 새로 이엉을 얹었느냐" 라고 편지로 묻기도 하셨다고 합니다. 초당에 걸린 다산초당 현판과 동암에 걸린 보정산방(寶丁山房정약용 선생을 보배롭게 모시는방)현판은 모두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씨를 새긴것이라고 합니다 그중 "다산 초당"의 현판글은 여기저기서 집자해 만든것이고 보정산방은 김정희(추사) 선생이 중년쯤 되었을 무렵 일부러 쓴것 인듯 명필다운 능숙한 경지를 보입니다. 참고로 김정희 선생은 정약용 선생보다 24세 연하지만 평소 다산 선생을 몹시 존경 했다고 합니다 추사,김정희 선생은 대흥사 13대종사이신 초의선사와는 동갑내기 절친한 사이였죠? 동암에는 다산 선생의 글씨를 집자한 "다산동암"이라는 현판도 함께 걸려 있는데 오늘날 다산초당에서 정약용 선생의 손길이 닿았던 흔적은 초당옆의 연못과 앞마당의 넓적한 바위와 집 뒤의 샘 그 뒤편 바위에 새겨진 "정석"(丁石)두글자 정도를 꼽을수 있다고 하지만 집 뒤의 샘은 선생이 마시던샘 물이고 앞마당의 바위는 선생이 솔방울을 태워 차를 달이던 곳이라 하여 다조(茶窕 차 부뚜막)라 불리던 곳이고 손수써서 새긴 "정석" 글자에서는 단아한 성품을 엿볼수 있습니다 이러한 흔적에서는 선생이 정 붙일만 한 거처를 얻은 기꺼움과 이곳에서 꾸려갈 생활에 대한 결의를 느낄수 있음을 알수 있고 네모진 연못을 파고 안에 자연석을 쌓아 둥근섬을 만들어 홈통으로 물을 끌어와 작은 폭포를 만들고 연못 뒤에 단을 만들어 채소를 가꾸기도 하셨던 점을 느낄수 있는곳 입니다 하지만 꼭 이러한 것 들에만 선생의 체위가 베었다고 할수는 없습니다 지금 천일각이 서 있는 동쪽의 산마루는 선생이 틈틈히 올라 바람을 쐬거나 흑산도로 귀양 가 있는 둘째형 (정약전)을 그리며 먼 바다를 내다본 곳이고 그곳에서 내려다 보이는 구강포 앞바다나 죽도, 건너편 칠량땅의 모습이모두 선생의 눈길이 닿았던 곳이라 할수 있습니다 (지금은 간척사업 때문에 바다 풍경이 예전처럼 시원스럽지 못한 점이 다르 다고 합니다.) 천일각옆을 지나 만덕산을 넘어 백련사로 이러지는 오솔길은 다산 선생과 혜장(惠藏)선사(1772~1811)가 유(儒) 불(佛)의 경계를 넘어 오고갔을 길이라고 합니다. 혜장 선사는 해남 대흥사 12대강사 이셨고 나이 서른에 두륜회(두륜산 대흥사의 불교학술대회)를 주도할 만큼 대단한 학승으로 백련사에 거쳐 하셨으며 정약용 선생이 읍내 사의재에 살던 1805년 봄에 서로 알게 되어 깊이 교루하였고 정약용 선생이 한때 보은 산방에 머물며 주역을 궁리하고 아들을 불러 공부시키거나 했던 것도 혜장선사께서 주선한 것 이라고 합니다 혜장선사는 정약용 선생보다 열살 연하였고 또 승려였지만 유학에도 조예가 깊었고 시에서도 뛰어났다고 합니다. 정약용 선생은 1811년 죽은 혜장선사의 비명을 쓰면서 논어, 또는 성리의 깊은 뜻을 잘 알고 있어 유학의 대가나 다름없었다 고 하였답니다 대흥사 12대강사 아암혜장 아암탑명에 이르기를 아암은 김씨이고 혜장은 법명(惠藏,法名)자는 무진(無盡) 본래의 호는 연파(蓮坡)이며 색금현(塞琴縣)화산방(華山坊)사람이다,1811년(신미년)가을에 병을얻어 9월14일 북암에서 시적(示寂)하니 나이겨우 40세였다. 다산 선생은 사의재에서 지내던 때에는 혼자 생활 하셨기 때문(대화할 상대가 없었음)혜장선사와의 만남은 선생의 막혔던 숨통을 튀울수 잇었고 혜장선사와의 토론에서 학문적 자극을 받고 외로움을 달랠수 있었다고 합니다 또 다산선생은 혜장선사를 통해 차를 알게 되었고 그후에 대흥사의 13대 종사이신 초의선사와(草衣.意恂,1786~1866)교류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다산선생은 24세 아래인 초의선사의 스승으로 모든 것 을 가르켰지만 차 만큼은 초의선사께 배웠다고 합니다 다산선생은 책보따리를 들고 이곳 저곳 거처를 옮기던 읍내 시절에도 학문하는 자세를 잃은적은 없었지만 다산초당으로 오신후 비로소 마음놓고 사색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본격적으로 연구와 저술에 몰두할 수 있었 고 만덕산의 산책길과 귤동마을 앞의 바다,스스로 가꾼 초당의 조촐한 정원 속에서 유배객의 울분과 초조함 은 위로를 받았고 산너머 백련사는 혜장선사로 인해 위안을 받았으며 또 유배 초기에 몹시 쌀쌀하게 대하던 해남 연동(녹우당)의 외가 에서도 이때쯤부터는 이런 저런 도움을 주었고 도움중 가장크게 생각한 것 은윤선도 선생에 이르러 이후 윤두서 선생의 후손에 이르기 까지의 많은 외가의 책을 볼 수 있었던 점이라고 합니다 다산 선생의 실학사상과 실사구시의 학문은 연동(녹우당) 외가댁의 영향도 컸던 것 으로 사료 됩니다 정약용 선생 선생은 다산초당에서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병들지 않은것 이 없는" 이땅과 그 병의근원을 깊이 들여다 보았으며 젊었을때는 물론벼슬하던 번거로운 시절에도 늘 마음에 두었던 실학과 애민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셨고 그 열매로 오늘낭 우리는 (목민심서),(흠흠신서),(경세유포)를 비롯한 500여권에 이르는 선생의 저서와 사상을 민족의 유산으로 가지게 되었습니다 목민심서를 다 써갈 무렵인 1818년에 유배가 풀려 고향으로 돌아가 완성했고 흠흠신서는 그 다음해에 완성 했다고 합니다 다산선생은 목민심서 서문에 "군자가학문하는것 의 절반은 수신(修身)하기 위함이요절반은 목민(牧民), 즉 백성을 다스리기 위한것인데 요즘 지방장관이란 자 들은 자기의 이익만 추구하는데 바쁘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곤궁하고 피폐해져 떠돌다가 굶어죽은 시체가 구렁텅이에 가득하건만 지방장관된 자들은 좋은 옷과 맛있는 음식으로 자기만 살찌우고 있다" 고 지적하고 중국과 우리나라의 여러 책에서 목민에 관한 사적을 가려뽑고 직접듣고 본 여러가지 폐단과 소견을 적었음을 밝힌후 이렇게 끝을 맺었다고 합니다 "심서(心書)라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백성을 다스릴 마음은 있지만 (유배지에 있는 몸으로) 몸소 실행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지은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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